더 나은 나를 위한 노력

출퇴근의 역사 by 이언 게이틀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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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21 아궁이와 사냥터를 분리하려는 열망, 즉 건강한 곳에서 살고 수익이 가장 많은 곳에서 일하려는 열망은 19세기가 진행되면서 점점 더 강화되었다. 이런 분리는 증기력을 이용한 운송숟ㄴ이라는 형태로 나타난 기술 때문에 가능해졌으며, 결국 통근의 꽃봉오리가 맺히고 머지않아 활짝 꽃을 피웠다. 이것이 ‘철도문화(locomotivity)’라고 일컬어진 더 커다란 발전의 일부였다. 1830년대에 시작된 이런 발전은 향후 50년 동안 영국을 변모시키게 된다.

p28 증기 열차는 가축뿐 아니라 인간도 혼란스럽게 만든다고 여겨졌다. 철도 반대자들은 그 부자연스러운 속도가 승객들의 정신 상태에 심각한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다고 경고했다. 1836년 <런던 새터데이="" 저널="">은 이 새로운 이동의 자유가 꼴사나운 속도로 "전 세계를 움직이게 만들었"으므로 재난에 가까운 결과각 나오리라고 예언했다. "천천히 걸어다니던 시민들이 마치 헤성처럼 이리저리 날아다니게 되었고, 이는 지력의 경거망동을 조장할 것이다. 성실하던 사람이 예측불허의 거짓말쟁이가 될 것이다. 그들의 생각은 그들의 막대한 거리 개념에 의해 과장될 것이다."

p32 정기권이 그토록 비쌌다는 사실을 토대로, 우리는 1세대 통근자들의 사회적 지위가 어떠했는지를 알 수 있다. (중략) 이 초창기 통근자 집단은 좋은 교육을 받았고, 자기주장이 강했고, 부유했다.

p35 철도가 생기기 전, 그러니까 장거리를 여행하면서 기대할 수 있는 최대 속력이 ‘경이의 역마차’를 이용한 시속 20킬로미터 정도였던 시절에는 이런 시간 차이가 전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기차를 타야 하는 상황이 되자 시계의 정확성이 중요해졌다. (중략) 결국 대부분의 회사들이 1840년 11월 그레이트 웨스턴 철도가 도입한 ‘철도 표준 시간’, 즉 그리니치 표준시(GMT, Greenwich Mean Time)을 채택하게 되었다. (중략) 이런 변화에 저항하는 사람들도 있긴 했지만 공통 시간(common hour)라는 명백한 상식은 널리 퍼지게 되었고, 영국 인구의 98퍼센트가 ‘철도 표준 시간’을 따르기로 한 뒤 엑서터 대성당의 주교도 결국 항복했다. 정확한 시간을 알아야 하는 필요성 때문에 시계 수요가 크게 늘었으며, 이는 시계 제조의 혁명으로 이어졌다. (중략) 불안해하는 여행자들이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 나오는 흰토끼처럼 주머니를 뒤지면서 "오, 이런, 오, 이런 이러다가 늦고 말겠어"라고 혼잣말로 중얼거리는 것이었다.

p109 영국에서는 1865년 제정된 도로상기관차법 때문에 지체가 불가피했다. 이 법률은 기계식 차량이 공용도로에서 운행할 경우 사람 한 명이 60보 앞에서 걸어가면서 붉은 깃발을 흔들고 나팔을 불어야 하며, 차량의 속도가 교외에서는 시속 약 6킬로미터, 도시에서는 시속 약 3킬로미터를 넘을 수 없다고 규정했기 때문이다. 아울러 이 법률은 “그런 기관차를 운전 및 조종하려면 최소한 세 명 이상을 고용해야 한다”고 규정했고, 기관차가 차량이나 수레를 끌고 가려면 더 많은 인원이 필요하다고 규정했다.

p113 자동차 통근 초기에는 미국의 여러 도시에서 자동차 통근을 권장했다. 여전히 교통수단의 대다수를 차지하는, 그리하여 심각한 위생 문제를 야기하는, 말이 끄는 운송수단을 자동차로 대체하려는 바람 때문이었다. 1898년 뉴욕에서 열린 국제도시계획회의의 최우선 의제는 말로 인한 공해였다. (중략) 회의에서 나온 계산에 따르면, 말의 개체수가 현재의 속도로 늘어날 경우 1930년에 이르러서는 뉴욕의 거리 전체가 3층 창문 높이까지 말똥에 파묻힐 수밖에 없었다.

p119 자동차가 선사하는 자유에 대한 꿈, 말의 시대의 종식 및 용인 가능한 과세라는 매력 같은 요인들은 대중교통을 희생시키고 자동차 통근을 증가시키는데 기여했다. (중략) 자동차는 말을 매우 신속하게 도로에서 몰아냈으며, 통근에서는 철도의 점유율 가운데 일부를 잠식했다. 그래도 여전히 자동차는 경쟁에 직면해 있었는데, 특히 단거리 여행에서는 전차 운영업체들이 경쟁 상대였다. 혹시 사람들이 운전에 지쳐서 대중교통으로 돌아가 버리면 어쩌나? 제너럴 모터스(GM, General Motors)는 ㅍ피이어스톤 타이어, 스탠다드 오일, 필립스 패트롤륨, 맥 트럭, 그 밖에 자동차 통근의 승리와 대중교통의 죽음에 대해 직접저기거나 기득권적인 이해관계를 지닌 여러 회사와 공조하여 자신들의 이익에 반하는 업체들을 매입한뒤 폐업함으로써 자신들이 두려워하던 결과를 피하기로 결정했다. 우선 이들은 내셔널 시티 전차를 공동설립했는데, 이것은 외관상으로는 전차 회사였지만 실제로는 전차 노선을 매입하여 파괴하는 데 시간과 돈 대부분을 사용했다.

p134 철도가 창조한 교외는 철로를 따라 마치 우산살처럼 도시 중심부에서 인근의 시골을 향해 뻗어나가는 경향을 보였고, 노선과 노선 사이의 방대한 땅은 전혀 손대지 않은 상태로 남아 있었다. 그러다가 통근자들이 오로지 자동차로만 도달할 수 있는 장소에 각자 꿈의 집을 지으면서 그 공간도 채워지게 되었다. 이들은 고속도로에서 왼쪽이나 오른쪽으로 벗어나, 철도 열풍 내내 시골로 남아 있던 장소에 정착했다. 이러한 재배치의 실현에서 무척 큰 역할을 담당한 헨리 포드는 디트로이트에서 약 15킬로미터 떨어진 곳에 2,000에이커(8제곱킬로미터) 면적의 부지를 확보하고 이런 유행을 선도했다. 그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는 도시를 떠남으로써 도시 문제를 해결해야만 한다.”

p137 넉넉한 주차 공간을 가진 단독주택은 이른바 자동차 통근자 교외의 원형이라고 할 만한 곳인 뉴욕 주 레빗타운(Levittown)의 기본 요소이기도 했다. 레빗타운을설계한 윌리엄 제어드 레빗은 포드의 대량 생산 원리를 주택에 적용하여, 1947년부터 1951년까지, 원래 감자밭이었던 자리에 1만 7,000채의 똑같은 주택으로 이루어진 공동체를 만들었따. 레빗타운의 주택은 ‘케이프 코드(Cape Cod)’는 한 가지 모델뿐이었는데, 그것은 자동차 교외의 T모델이라 할 수 있었다.

p140 급기야 상점들이 도시를 떠나 이들을 찾아왓다. (중략) 마찬가지로 오로지 차량으롬나 접근할 수 있는 쇼핑몰들 또한 교외 주변 및 내부에 생겨났다. (중략) 쇼핑몰은 위생과 안전이라는 장점을 부각함으로써 고객들이 차별화된 그 경험에 주목하게 만들었다. 거기서는 굳이 보도에서 주정뱅이와 거지를 피해 다닐 필요가 없었으며, 배달ㅇ르 기다리거나 양팔 가득 꾸러미를 들고 대중교통을이용해 집으로 돌아갈 필요가 없었다. 각자의 자동차 트렁크에 짐을 싣고 떠나면 그만이었다.

p181 1946년 엔리코 피아조는 이 도시의 거리에 스쿠터를 도입했다. 2차 세계대전 이후 저렴한 개인용 교통수단의 수요가 늘어나리라 예측한 그는 “기관들과 요소들의 합리적인 복합체인 차체에 기계 부분을 모두 뒤덮도록 설게한 엔진 덮개와 흙받기를 조합한 동력 자전거”를 항공공학자 코라디노 다스카니오와 함께 설계했다. (중략) 이동성은 곧 기회를 뜻했으며, 베스파 소유 여부에 따라 좋은 일자리와 실직으로 갈릴 수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전거 때문에 그랬듯이, 이탈리아인들은 스쿠터를 사려고 저축을 하거나 돈을 빌리거나 심지어 전당포에 담보를 잡히기까지 했다.

p199 즉 민주주의 국가에서의 통근은 두 바퀴 차량 그리고/또는 대중교통에서 벗어나 자동차에 이르는 자연스러운 발전 과정을 따르고, 통근자는 부가 증대됨에 따라 더 고급품으로 갈아타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선진국에서는 이런 발전 과정이 이미 완료되어 일종의 반유행이 나타나고 있다. 통근자들이 V8엔진에서 페달 밟기로 역행한 것이다. 오늘날 암스테르담이나 코펜하겐처럼 평지로 이루어졌거나 규모가 작은 유럽 도시에서는 통근자의 3분의 1이 자전거를 타고 일터로 가며, 동력 교통수단을 계몽이 덜된 시대의 산물이라고 비웃는다.

p207 1963년에 인류학자 에드워드 T.홀은 헤디거의 연구를 인간에게까지 확장했다. (중략) 홀은 개인적 장소에 관한 우리의 필요를 네 가지 범주로 나눈다. 첫째, ‘친밀한 거리(intimate distance)’는 친지와 연인에게 허락하는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따지는데, 여기서는 분리보다 오히려 접촉이 강조된다. 둘째, ‘개인적 거리(personal distane)’는 음주 파티에 참석했을 때 아직 취하지 않은 상태에서 다른 사람들에게 허락하는 거리가 얼마나 가까운지를 따진다. 셋째 ‘사회적거리(social distance)’는 사업 관계에 있는 낯선 사람들과 얼마나 가까이 있고싶어 하는지를 따진다. 넷째, ‘공적 거리(public distance)’는 정치인과 스타 가수를 비롯한 연예인이 무대 위에서 누비는 거리로, 이 때 이들은 몸짓과 자세를 이용해 관객과 의사소통을 한다. 홀은 자신의 이 새로운 과학을 ‘근접학(proxemics)’라고 불렀다.

p233 1950년대에 미국에서 건설된 고속도로가 해결해주리라 예상되었던 문제들은 오히려 더 악화되고 말았다. (중략) 경제학자 질러스 듀랜턴과 매슈 A.터너에 따르면, 오늘날에는 “도로가 교통량을 낳”고 있으며, “새로운 도로를 건설하고 기존의도로를 확장할 경우, 오히려 추가 교통량을 발생시키고 최고점까지 늘어나게 만들어서 결국 도로 정체가 이전 수준으로 돌아오게 된다”.

p263 사람들이 통근을 하는 주된 이유로는 다음의 세 가지가 꼽힌다. 1) 더 나은 일자리를 찾기 위해, 2) 더 좋은 집에 살기 위해, 3) 매일같이 여행하고 싶은 자연적인, 또는 학습된 충동의 표현이라서.

p269 여행 자체만으로는 아무런 이점이 없다고 간주되었다. 그런데 캘리포니아 대학 부설 교통 연구소의 데이비드 오리와 그의 동료들이 2004년에 발표한 논문 <통근이 개인에게 바람직할 대는 언제인가? (When is Commuting Desirable to the Individual?)>는 “여행 도중에수행하는 활동에 긍정적인 실용성이 있을 뿐 아니라, 여행일나ㅡㄴ 행위 자체에도 실용성이 있다”라고 주장했다. 대중교통의 경우 “생각하고, 대화하고, 음악을 듣고, 책을 읽고, 심지어 자을 자는 것” 등이 바로 그런 활동이다. 혼자 운전하는 경운에는 “다양성, 속도, 심지어 그냥 움직이는 일 자체를 즐기는 것, 주위 환경에 대한 직접적인 정보를 습득하는 것, 운전 솜씨나 멋진 자동차를 남들 앞에 선보이는 것, 또는 탈주 그 자체”가 바로 그런 활동이다.

p338 현학자들은 어디에서나 무려 40년 가까이 ‘원격 통근(telecommuting)’을 통근의 미래오 예찬해왔다. 특히 미국에서 그랬다.

p342 유럽 연합 역시 ‘원격 근로(telework)’라고 자체적으로 명명한 것에 열성적이어서, 1990년대 말에 정책 권고 초안을 잔뜩 마련하 다음, 2002년에는 ‘주요 사회적 협력자들’의 승인을 받은 기본 틀을 수립하고, 그것을 기정사실로서 유럽 각국 정부에 제출했다.

p348 역설적이게도 인도의 원격 통근자들 가운데 상당수는 가상 여행의 스트레스에직면해야 할 뿐만 아나라, 실제의 통근으로 인한 불편 역시 감내해야 한다. 전화 상담 센터가 서양의 도로 정체를 완화할지는 몰라도, 그 센터가 들어선 곳에서는 오히려 도로 정체가 증가하기 때문이다. 벵갈루루에서는 러시아워 때마다 눈부신 교통 정체가 일어나며, 대중교통시스템은 거의 인파에 파묻힐 지경이다. 뭄바이와 마찬가지로 그곳에서도 초밀도 승객 욱여넣기가 벌어지며, 수많은 사망자가 발생한다. 실제로 현재까지 원격 근로는 물리적 통근을 제거하기보다는 오히려 그것을 해외로 보내버린 데 불과했다.

p388 운전자 없는 자동차 통근에는 막대한 돈이 걸려있다. 미국의 자동차 시장 하나만 따져도 매년 2조 달러의 가치가 있다. 그러나 승자가 있다면 패자도 있게 마련이다. (중략) 잠재적 패자들의 명단은 길고, 그 명단의 선두에는 기존의 자동차 산업 전체가 있다. (중략) 민간 부분의 패배자에는 응급실 근무자, 장의사, 보험회사, 변호사, 주차장, 부품 제조업체 등이 포함될 것이다. 공공 부문에서는 주차 위반 및 과속 벌금, 유류세와 도로세로 인한 세입을 읽게 될 것이다.

p401 통근은 도시의 형성과 성장을 촉진했다. 통근은 새로운 기술의 시험 무대인 동시에 판매 시장이기도 했다. 인도주의적 관점에서 봐도 통근의 영향력은 압도적으로 그정적이었다. 지난 한 세기 반 동안 통근은 수많은 사람들에게 각자의 삶을 향상시킬 기회를 제공했다. 본질적으로 통근은 이동의 자유를 제공했다. 그에 따르는 사소한 여러 가지 짜증과 빈번한 불편에도 불구하고, 통근은 우리 삶의 긍정적인 부분이었다.